2020년에 전쟁기념관에서 대한식 소총 실물을 공개했다. 이 영상의 답변 댓글에 의하면 대한식 소총 4호 및 7호의 대략적인 크기가 전체 1180mm, 총열 660mm 라고한다.
한국산 총기 개발사업은 광복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채병덕은 부평지역에 있었던 인천 일본육군 조병창 공장장(陸軍造兵廠工場長)에 재임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이 되면 구 일본군 조병창이 장래 한국군 창설에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될 거라고 보고 설비가 파손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잘 관리했는데, 미 육군 제24군단이 와서 이곳에 주둔하며 몽땅 때려부순 후 파묻어버렸다. 이후 부평지역(인천)에 있었던 조병창을 다시 지었다.
그 결과 국방부는 육군 병기공창을 국방부 직할로 흡수하여 1949년 12월 15일에 병기행정본부를 창설하고 시설확충과 기술향상에 주력하던 중, 1950년 6월 15일에 부산에 제1조병창을 창설하고 인천 제2공장을 제2조병창으로 개편하였으며, 병기와 탄약의 학리적 연구와 시험제작을 목적으로 하는 과학기술연구소를 창설하였다. 이로써 걸음마 단계이나마 군수공장이 첫 출발할 수 있었다. 그 후 6.25 전쟁의 발발로 부산을 제외한 모든 생산시설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 파괴됨에 따라 부산의 시설만을 이용하여 수류탄의 생산과 노획병기의 장비 등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전세의 역전으로 9·28수복이 이루어지자, 이 군수관련 기구들은 일시 서울로 이동하였으나 전세가 악화되어 다시 철수하게 되자, 제2조병창은 제주도로, 본부와 과학기술연구소는 부산으로 각각 이동하여 병기[5]를 생산하였다.
각 조병창은 1951년에 접어들면서 일본으로부터 수류탄 자재, 뇌관 도입선을 수입하여 타격식의 수류탄을 다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이와 더불어 99식 소총탄환과 대한식 소총 그리고 대인마 지뢰와 30kg 폭탄도 제조하기 시작함으로써 보다 발전하게 되었다. 국방부는 1952년 병기행정본부를 관리국으로 개편하고 제1조병창을 총포공장으로, 제2조병창을 탄약 및 화약 공장으로 운영하였으며, 이해 10월 1일에 제1·2조병창 및 과학기술연구소는 국방부 조병창 및 국방부 과학기술연구소로 각각 발족하게 되었다.
한편 이해 5월 31일부 조병중견기술자의 육성을 목적으로 한 기술원양성소를 설치하게 되어 제1기생 34명을 선발하여 소정의 교육을 이수하게 한 다음 12월 27일에 제1기생 27명을 배출하였으며, 이어 제2기생 33명을 선발하여 입소시켜 교육을 실시하던 중 교육과정의 개편으로 종래의 교육기간 6개월을 1년으로 연장 실시하게 되었다. 국방부는 1953년부터 병기탄약에 대한 제조기술의 완전해결과 최신식 제조연구시설이 연구조사 및 시설도입을 추진하였다. 결과적으로 국군은 그 해 안에 연구제조 기기를 목표량의 90%까지 도입 확보할 수 있게 되어 조병기술의 본격적인 연구개발에 주력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군수 병기분야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이후 시간이 더 지나 1971년, 외산 무기를 개량하고 한국 내에서 자력으로 무기를 생산하려는 번개사업이 추진되면서 국방과학연구소에 미군 무기를 40일이라는 단기간에 복제/개량하는 지시가 내려지고, 제작품 중에는 M14 소총을 모델로 M1 개런드를 개조해 외부탄창과 자동사격이 가능하도록 개량한 MX 소총이 2정 제작되었다.[6] 당시에는 M16 소총을 이미 국내에서 라이선스 생산을 시작해 제식소총으로 결정되어 있는 상태였으므로 MX 소총은 예비군용 총기로 생산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