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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Pueblo Incident)은 미 린든 B. 존슨 행정부 시절이던 1968년 미 해군 소속 정찰함 USS 푸에블로 (AGER-2)가 동해 공해상(동경 127 °54.3 ', 북위 39 °25 ')에서 북한 해군에 의해 나포되어 82명의 미 해군 승무원들이 11개월이나 붙잡혀 있다가 풀려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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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군 56함 침몰 사건이 발발한 지 1년 뒤이자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1.21 사태 이틀 후인 1968년 1월 23일 북한 원산 앞 공해 상에서 해양 조사선으로 위장한 미군의 정찰함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었다. 푸에블로호는 일본 큐슈에서 출발해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소련의 극동 기지를 정찰한 뒤 북한의 동해안에서 정보를 수집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1월 23일 정오경 원산앞바다에서 1척의 북한의 초계정으로부터 무전으로 “국적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고 “미국 소속”이라고 답변했다. 이에 북한 함정은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해 왔고, 미 해군은 “공해 상에 있다”는 답전으로 이를 거절하였다. 약 1시간 후 북한 함정의 지원을 받고 3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기가 도착하여 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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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동강변에 전시되어 있는 프레블로호

 

 

북한 미그기들이 주변을 선회하고 있는 동안 한 척의 북한 초계정이 접근하였으며 무장군인들이 푸에블로호에 승선하였다. 이때가 12:40분이었다. 푸에불로호는 “무력 저항을 하지 않았다”면서 원산항으로 끌려간다고 보고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망을 시도하다가 3명이 부상당하고 1명이 피살된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즉각 미국은 일본에서 월남으로 항해중인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와 3척의 구축함을 진로를 변경시켜 원산만 부근에서 대기토록 하였으며, 25일에는 해공군의 예비역 14,000여 명에게 긴급 동원령을 내리고, 전투기를 비롯한 항공기 372대에 대한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했으며, 오산과 군산기지에 2개 전투기대대를 급파하는 등 군사적 조치를 위해 나갔다. 28일에는 추가로 2척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1척 및 6척의 잠수함을 동해로 이동시킴으로써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소련을 통한 외교교섭이 소련의 거부로 실패하자, 미국 측은 한국정부의 반발을 무릅쓴 채 2월 2일부터 판문점에서 북한당국과의 비밀협상에 들어갔다.[2] 한편 이 사건이 마무리된 불과 4개월 후인 1969년 4월 15일 미 해군 정찰기 EC-121가 동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북한에 의해 격추됨으로써 또다시 한반도에 급박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승무원 31명을 태우고 일본에서 출발한 미 해군 EC-121 정찰기는 동해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북한에 의해 격추되어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한반도 주변에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를 급파하는 등 한반도에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갔다.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한 존슨 행정부의 초기 인식은 냉전적 사고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 이전부터 갖고 있었던 대북인식에 기초하여 푸에블로호 사건의 배경을 소련과 북한의 공모,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시도 등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이러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한반도에 제2의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베트남 전쟁과같은 글로벌 전략의 일부였기 때문에 푸에블로호 사건도 전략적 수준의 선후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틀 속에서 북미협상에 임했던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나포된 승무원을 송환해야 하는 두 가지 목표가 서로 충돌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북한의 의도대로 북미 간 직접협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나포 당시에는 군사적 충돌까지 감수했으며 군사정전위원회 비공개 협상에서 강경한 자세를 고수했다. 북미협상을 통해 북한은 국가간의 관계를 부각시키고 국내정치적으로 주체사상의 성과를 선전했다. 무엇보다 미국과 협상을 지속하면서 미 국무부의 직접 개입으로 전개된 협상자체가 북한의 국가적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미국은 협상 주도권을 북한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미국의 협상력(negotiation power)이 제한된 이유는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서 협상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인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를 한국과 미국 국내에 공개할 수 없었던 현실 때문이었다. 그 결과 미국은 박정희 정부의 방기 우려, 북한의 강경한 자세 그리고 미국의 연루 우려라는 3중 제약 속에서 전례 없는 기묘한 타협을 이끌어냈다. 나아가 밴스 특사의 방한 이후 존슨 행정부 내에서 북한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미국의 대북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근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