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광복 80년 맞아 미주 항공독립운동가 후손 30여 명 초청

- 국립대전현충원 참배하고, 공군사관학교·1전투비행단 등 견학

 

[더코리아뉴스 이상원 선임기자] 광복 80년을 맞아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임시정부 비행학교) 주역들의 후손들이 공군사관학교, 전투비행단 등을 방문해 대한민국의 번영과 평화를 수호하는 공군의 위용을 직접 보는 시간을 가졌다.

 

1.jpg

공군과 국가보훈부는 8월 12일(화)부터 16일(토)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 관계자들의 후손들을 공식 초청했다. 사진은 12일(화) 후손들이 대전국립현충원을 찾아 분향 후 참배하고 있는 모습. 대전 현충원에는 박희성, 이재수 등 임시정부 비행학교 관계자들이 안장되어 있다.

 

 

공군과 국가보훈부는 812()부터 16()까지 임시정부 비행학교 관계자들의 후손들(이하 후손들)을 공식 초청했다. 주로 미국에 거주하는 후손들은 한 주 동안 대한민국 공군의 발전된 모습을 직접 보고, 공군사관학교와 제1전투비행단의 비행교육 과정도 견학한다.

 

이 행사에는 비행학교 설립을 주도했던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 비행학교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김종림 지사, 비행학교의 재무와 운영을 맡았던 이재수 지사, 한인 비행사 오임하, 이용선, 이초, 장병훈, 한장호, 박희성 지사 등 9인의 항공독립운동가 후손과 가족 20여 명이 초청됐다.

 

2.jpg

공군과 국가보훈부는 8월 12일(화)부터 16일(토)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 관계자들의 후손들을 공식 초청했다. 사진은 12일(화) 후손들이 대전국립현충원을 찾아 선조들의 묘역을 찾아 헌화하고 있는 모습. 대전 현충원에는 박희성, 이재수 등 임시정부 비행학교 관계자들이 안장되어 있다.

 

 

미주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 내 설립된 비영리 단체 (KIL: Korean Independence Legacy)’ 소속 10여 명도 함께 방한해 일부 일정들을 함께한다. 이 단체는 박희성 지사의 조카손녀인 임인자 선생의 주도로 설립됐다. 박희성 지사는 이용근 지사와 함께 19217월 임시정부로부터 육군비행병 참위(오늘날의 소위)로 임명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교들인 것이다.

 

윌로우스(Willows) 비행학교로도 불려온 임시정부 비행학교는 19193·1운동 이후 임시정부와 재미 한인사회의 노력으로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의 소도시 윌로우스에 설립됐다.

 

임시정부 비행학교는 노백린 등 임시정부 인사들과 미주 한인사회 지도자들의 독립 열의와 통찰력, 헌신이 만들어낸 항공독립운동의 결정체로 평가된다.

 

3.jpg

공군과 국가보훈부는 8월 12일(화)부터 16일(토)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 관계자들의 후손들을 공식 초청했다. 사진은 12일(화) 후손들이 공군사관학교를 찾아 차준선 공군사관학교장(중장)으로부터 '제1기 졸업생 첫 출격 서명문 태극기' 기념품을 전달받고 있는 모습.

 

 

미주 한인사회의 후원을 받아 광복군 군단을 창설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일제와 싸울 항공력을 키운다는 선구적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애쓴 대한인국민회 북미중앙총회 간부들과 이들의 뜻대로 미국 내 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익히던 한인 청년들, 임시정부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쾌척한 윌로우스 일대 한인 농장주들이 임시정부 비행학교를 만든 주역들이다.

 

후손들은 12() 선조들이 안장되어 있는 대전현충원 참배로 공식일정을 시작했다. 이후 공군 정예장교를 양성하는 공군사관학교를 찾아 교육·훈련체계에 대해 설명을 듣고, 교내 시설들을 둘러봤다.

 

후손들은 학생조종사들이 비행훈련을 받고 있는 제212비행교육대대도 찾아 학생조종사들을 격려하고 간담회를 가졌다. 2025년의 학생조종사들이 1920년 임시정부 비행학교 생도들의 신념과 열정을 이어받아 대한민국 수호 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4.jpg

공군과 국가보훈부는 8월 12일(화)부터 16일(토)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 관계자들의 후손들을 공식 초청했다. 사진은 12일(화) 후손들이 공군사관학교 소속 제212비행교육대대를 견학하고 있는 모습. 212대대는 국산 훈련기 KT-100을 운용하며 공군 정예 조종사 양성을 위한 비행교육 입문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13()에는 후손들이 공군의 고등비행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제1전투비행단에서 부대 현황을 소개받고, 학생조종사들과 간담회를 갖는다.

 

광주기지에 위치한 제1전투비행단은 공군 최초의 비행단으로, 6·25전쟁 시 승호리 철교 차단작전 등의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지금은 국산 초음속 훈련기인 T-50과 전술입문훈련기인 TA-50 Block2를 운용하며 정예 전투조종사를 양성하고 있다.

 

광복절 당일인 15() 오전엔 행정안전부가 주관하는 80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한다. 오후에는 잠실야구장에서 펼쳐지는 프로야구 경기에서 시구·시타도 계획돼 있다.

 

기아타이거즈와 두산베어스의 주말 시리즈 첫 경기에 앞서 노백린 장군의 손자 노영탁 선생(88)이 시구를, 박희성 지사의 조카손녀인 임인자 선생(69)이 시타를 한다.

16()에는 국립항공박물관, 임진각 평화누리 등을 견학한다.

 

5.jpg

공군과 국가보훈부는 8월 12일(화)부터 16일(토)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 관계자들의 후손들을 공식 초청했다. 사진은 12일(화) 공군사관학교 제212비행교육대대를 방문한 후손들이 국산 훈련기 KT-100 좌석에 앉아 학생조종사로부터 항공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212대대는 국산 훈련기 KT-100을 운용하며 공군 정예 조종사 양성을 위한 비행교육 입문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임인자 선생(69, 박희성 지사의 조카손녀)해외에서 대한민국 공군의 발전상과 활약상을 접할 때마다 기쁨과 긍지를 느꼈는데, 공군의 공식 초청으로 공군사관학교, 전투비행단의 면면을 직접 보고 들으니 더욱 감개무량합니다. 100여 년 전 임시정부 비행장교로 임명됐던 백조부께서 이 모습들을 보신다면 얼마나 뿌듯해하실지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을 것 같습니다.”

 

김권희 공군본부 정훈실장(대령)항공력을 키워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겠다며 분투했던 임시정부 비행학교 항공선각자들의 정신은 지금도 대한민국 공군 장병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후손들에게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의 발전된 모습과 강력한 위용을 보여드릴 수 있게되어 뜻깊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윌로우스 비행학교)

 

9 노백린 사진 1.jpg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 설립의 주역 노백린 장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는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글렌 카운티에 있는 소도시 윌로우스에서 항공독립운동을 위해 설립·운영되었던 기관이다. 이 때문에 윌로우스 비행학교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와이에서 박용만과 함께 대조선국민군단을 만들어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하고 있던 노백린은 19199, 상하이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임명된다. 노백린은 군무총장으로서 미주 한인사회에 독립전쟁론을 전파하고, 임시정부에 대한 한인들의 후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미국 본토를 방문한다.

 

10 김종림 사진 1.jpg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 설립의 주역 김종림 지사

 

 

앞서 19193·1 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미주 한인사회는 독립 열의에 가득 차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청년들은 독립을 이루기 위해 임시정부에 혈성을 다해 충성할 것을 맹세하고, 군사상의 기예를 배워 독립운동에 기여하겠다는 취지로 청년혈성단을 조직했다.

 

샌프란시스코에 거점을 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윤병구와 곽임대 등은 일본의 공군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한인 비행사들을 양성한다면 장차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라 보고, 청년혈성단 단원들을 미국 내 비행학교에 들여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이초, 이용선, 오림하, 한장호, 이용근, 장병훈을 레드우드비행학교에 입과시킬 수 있었다.

 

노백린이 샌프란시스코에 이르자 북미지방총회 간부들은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며, 레드우드비행학교에 재학 중인 한인 청년들을 만나도록 주선한다. 노백린은 또 윌로우스 일대에서 대규모 쌀농장을 운영하던 김종림, 이재수 등과도 만난다. 노백린과 캘리포니아의 한인들은 임시정부 예하의 군단 창설을 논의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인 비행사를 양성할 비행학교의 설립을 결의하게 된다.

 

쌀의 왕으로 불리던 사업가 김종림은 비행학교 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40에이커의 땅에 학교건물을 마련하여 19202월 말 비행학교를 임시 개교했고, 3대의 항공기를 확보한 후 비행교관들을 채용했다. 비행학교가 정식으로 개소되기 전에 박희성, 이용근 등이 생도로 입교했다. 생도들은 둔전병 방식으로 노동과 군사훈련을 병행했다.

 

19 한국인들 항공분야를 가지다.jpg

임시정부 비행학교 설립을 보도한 윌로우스 지역 일간지 ‘Willows Daily Journal’

 

16 스탠더드 J-1 사진 3.jpg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에서 운용하던 당대 최신예 항공기 스탠다드사의 J-1 측면에는 K.A.C가 새겨져 있다우측은 국립항공박물관이 당시 모습을 복원해 관내 전시하고 있는 J-1

 

 

17 스탠더드 J-1 사진.jpg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에서 운용하던 당대 최신예 항공기 스탠다드사의 J-1 측면에는 K.A.C가 새겨져 있다우측은 국립항공박물관이 당시 모습을 복원해 관내 전시하고 있는 J-1

 

 

비행학교는 당시 최신예기인 스탠다드사의 J-1을 훈련기로 도입했다. 훈련기 기체에는 ‘Korea Aero Club’의 줄임말인 K.A.C가 새겨졌다. 낯선 동양인들이 비행학교 설립 움직임에 백인들의 반감이 컸던 것을 감안해 ‘Korean Aviation Corp’라는 군사조직명을 공공연하게 쓰기 어려워 그렇게 바꿔 불렀다는 해석도 있다.

 

192075, ‘대한인비행가양성소라는 이름으로 비행학교의 개소식이 열렸다. 비행학교는 전문적인 비행훈련뿐 아니라 무선통신, 비행기수선학(정비학), 영어교육, 민족교육 등을 통해 독립의식과 지성을 갖춘 한인 비행사를 양성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20여 명의 생도들은 훈련경비를 스스로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노동과 군사훈련을 병행했다.

 

노백린이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에게 보낸 서신에는 향후 10대의 비행기를 구입해 독립전쟁에 활용할 비행대를 만들겠다는 포부가 담겨있었다. 비행학교가 윌로우스 교육청에 학생규모 100여 명으로 보고한 것으로 보아 100명 가량의 생도를 모집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 말 기록적인 폭우로 한인농장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비행학교는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고, 19214월 끝내 문을 닫게 된다. 일부 교관과 학생들은 다른 비행학교로 옮겨 비행훈련을 지속했다.

 

새크라멘토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이어간 박희성과 이용근은 19217, 국제항공연맹 비행사 면장을 받았다. 박희성은 앞선 시험에서 항공기 사고로 중상을 입었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합격해 한인사회를 숙연하게 했다.

 

 

14 박희성 면장 최종.jpg

1921년 발급된 박희성과 이용근의 국제항공연맹 조종사 면장

 

임시정부는 박희성과 이용근의 비행사 면장 취득 소식을 듣고, 이들을 육군비행병 참위(오늘날의 소위)로 임명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15 상해판 독립신문 1921.8.15 확대본 복사.jpg

임시정부가 이용근과 박희성을 육군비행병 참위로 임명했다고 보도한 독립신문기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전쟁 양상의 변화를 내다보며, 강한 항공력으로 조국의 독립을 앞당기겠다는 선구자적 구상을 했다. 191911월 공포된 대한민국임시관제에서 군무부 안에 육군국과 해군국을 분리하였는데, 육군국 안에 육군비행대에 관한 사항’, 해군국 안에 해군비행대에 관한 사항을 두는 등 육·해군에서 각기 비행대를 운영하는 것을 명문화했다.

 

, 19203월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총리 이동휘는 14개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정방침을 발표했는데, 이 안에는 미국에 기량이 우수한 청년을 선발 파견하여 비행기 제조와 비행전술을 학습케 한다.”비행기대 편성조항이 있었다. 이는 미국에서 임시정부 비행학교 설립을 추진하던 군무총장 노백린과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이 긴밀하게 공조하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윌로우스의 임시정부 비행학교에는 일제와 싸우기 위해 비행기대를 편성하겠다는 임시정부의 의지가 스며들어 있다.

 

동경에 날아가 쑥대밭을 만들자했던 1920년 임시정부 비행학교 주역들의 결의는 현실화되지 못했지만, 여러 방면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곽임대는 엘리트 장교 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켄터키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흥사단 일원으로 활동했다. 훗날 이초는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요원이 되어 비밀작전인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에 투입됐다. 김종림, 조종익 등은 일본과 싸우겠다는 일념으로 고령의 나이에도 의용군에 입대했다. 일부는 중국군 조종사가 되어 일제와 싸웠다는 기록도 있다. 그들의 신념과 열정은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에 고스란히 계승되고 있다.

 

제공 정책브리핑실

더코리아뉴스 disf@disf.kr

 

 

 

Copyright더코리아뉴스. All rights reserved·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