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월 12일 밤 8시께, 서울 한복판 종로경찰서 서편 유리창을 뚫고 폭탄 하나가 날아들어 터졌다. 일제 식민통치를 뒷받침하는 경찰력의 본산으로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해 온 종로경찰서를 폭파하려는 이 의거에 일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폭탄이 터지면서 경찰서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건물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7명이 중경상을 입었지만, 당시 일경은 이 투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종잡지 못하고 있었다. 일경이 투탄의 주역을 알아낸 것은 의거 닷새 후인 1월 17일이었다.
김상옥 의거는 두 달 후가 되어서 《동아일보》에서 호외로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이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의 주인공이 바로 서른세 살의 청년 김상옥(金相玉, 1890~1923)이다. 그는 서울 어의동에서 영문(營門) 포수(砲手) 김귀현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아호는 한지(韓志).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열네 살부터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했다. 1910년에는 경성 영어 학교에 다니며 국제정세와 서양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1912년, 스물두 살에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연 영덕철물상회는 한때 종업원 50여 명에 이르렀다니 그의 상재(商才)는 남달랐던 듯하다. 이후 그는 1917년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일화(日貨)배척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말총 모자를 창안, 생산해 보급하였고 농기구·장갑·양말 등도 아울러 생산해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국산품을 장려하는 데 앞장섰다.
중국 상하이 망명 시절의 한지(韓志) 김상옥(1890~1923) 의사
3·1운동 때 무장 경관을 때려뉘고 칼을 빼앗은 담대한 인물
김상옥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3·1 독립운동 이후부터다. 그해 4월, 동대문교회 안의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혁신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신공보>를 펴냈다. 12월에는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 고관과 민족 반역자를 응징하였다.
1920년 4월, 김상옥은 한훈(1968 독립장)·유장렬(1968 독립장) 등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 민족 반역자 서 아무개 외 여러 명을 총살하였다. 또 화순의 오성(烏城) 헌병대 분소를 습격해 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다. 3·1운동 당시 시위대열에서 무장 경관을 때려뉘고 장검을 빼앗았으며 뒷날 경성을 뒤흔든 활약에서 드러나듯 그는 담대하고 호방한 인물이었다.
같은 해 8월에 미국의원단이 조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5월부터 김동순·윤익중·신화수·서대순 등의 동지와 함께 미국의원단을 영접하러 나오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과 일본 고관을 암살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일경에게 탐지되어 동지들이 붙잡히자 그는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의열단에 가입한 그는 1921년 7월, 귀국해 충청도·전라도 등지를 순화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상해의 임정에 전달했다. 1922년 11월 중순 상해에서 임정 요인 이시영·이동휘·조소앙·김원봉 등과 의논해 일본 총독과 주요 관공서에 대한 암살·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세웠다.
거사를 위해 입국하면서 김상옥이 동지들에게 남긴 말은 그가 자신의 운명을 미리 내다본 듯 비장하고 결연했다.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이듬해 1월, 일본 제국의회 참석차 동경으로 가는 사이토를 암살하기 위해 김상옥은 안동현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갔다. 임정에서는 권총 4정과 실탄 수백 발을 마련한 안홍한을 수행하게 하였고, 대형 폭탄은 의열단에서 맡아 김한에게서 받기로 했다.
서울시 종로구에 세운 김상옥 의거 터 표석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이 폭탄을 던진 종로경찰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경찰력의 본산이었다.
상해를 떠나면서 농부로 변장한 김상옥은 밤을 틈타 압록강 철교를 건너며 경비 경관을 사살하였고, 신의주의 세관 검문소를 지나면서 보초를 때려뉘고 국내에 잠입하였다. 서울에 와서 김한·서대순 등 동지들과 만나 거사 계획을 점검했으나 상해 주재 일경의 통보로 일제가 경계를 강화하자 거사는 계속 연기되었다.
폭파 의거 후 이어진 영화 같은 총격전
1월 12일의 종로경찰서 폭파 의거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김상옥을 추적하던 일경은 그가 삼판통(현재 후암동)의 매부 고봉근의 집에 은신해 있음을 탐지하고 종로경찰서 우메다(梅田), 이마세(今瀨) 두 경부의 지휘 아래 20여 명의 무장경찰로 은신처를 포위했다.
1월 17일 새벽 3시였고 그날은 거사 당일이었다.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도쿄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출석하려고 남대문 역에서 경성을 떠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은신처를 역에서 가까운 삼판통(三坂通)으로 정한 것도 거사 때문이었는데 일경이 그를 먼저 찾아낸 것이었다.
일경 체포조가 그가 은신한 방을 덮치자 방안에서 발사된 총탄이 종로경찰서 유도 사범이며 형사부장 다무라(田村)를 쓰러뜨렸다. 가슴을 맞은 다무라는 즉사했고 이어 이마세는 오른쪽 손목과 왼쪽 옆구리를 맞았고 우메다는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 일경이 전열을 가다듬었을 때 이미 김상옥은 은신처를 탈출한 뒤였다.
정복 순사 1천여 명이 동원된 남산의 수색망은 ‘쥐새끼 하나 도망하여 나갈 틈이 없이'(당시 신문 기사) 촘촘했고 남산 자락의 모든 거주지에 대한 가택수색이 이루어졌지만, 그의 종적은 묘연했다. 김상옥은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남산을 거쳐 금호동에 있는 사찰 안장사(安藏寺)에 이르러 있었다.
영화 <밀정>의 초반부에 일제와 맞서다 자결하는 김장옥이 바로 김상옥을 모티브 한 캐릭터다.
절에서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고 하산한 김상옥은 18일은 무내미[수유리(水踰里)] 이모 집에서 잤고 19일 새벽에는 삼엄한 일경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으로 옮겨 은신에 들어갔다. 탈출하면서 걸린 동상을 치료하면서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저울질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의 은신처도 일경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상해로부터 효제동으로 온 서신을 전해준 전우진이 일경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문초당한 결과였다. 삼판통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일경은 경기도 경찰부장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기마대와 무 장경관 수백 명이 은신처와 효제동 일대를 포위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은신처를 급습한 동대문서 고등계 주임 구리다(栗田) 경부가 이끄는 결사대 5명과 맞서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쥐고 3시간 반에 걸친 총격전을 벌였다. 구리다를 비롯한 10여 명을 살상했으나 중과부적, 탄환마저 다했다.
마지막 탄환이 재인 권총을 머리에 대고 김상옥은 방아쇠를 당겼다. 10시 30분, 7시부터 시작된 총격전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탈출 과정에서 발과 무릎까지 동상에 걸린 데다 열한 발의 총탄을 맞은 그의 주검은 참혹했다.
김상옥은 숨이 멎는 순간까지 권총을 놓지 않았다. 검시관은 그가 오른손 검지를 방아쇠에 걸고 권총을 힘있게 쥐고 있었다고 썼다. 향년 33세. 의열투쟁으로 식민 지배자를 응징하고 대중 의식의 혁명화를 꾀하려 했던 두 아이의 아비는 그렇게 짧고 불꽃 같았던 삶을 마감했다.
‘동대문 철물점 홍길동’의 장렬한 최후
김상옥은 ‘사격은 물론, 변장과 잠적’의 명수로, 일제 관헌의 추격을 여러 차례 따돌려 ‘동대문 철물점의 홍길동’이란 별칭에 전국에 널리 퍼졌다. 이에 많은 청년이 그를 따라 항일 독립투쟁의 길로 나섰다고 한다.
당시 중학생으로 효제동 총격전을 목격한 화가 구본웅(1906~1953)은 그의 시화첩 <허둔기>(1930)에 스케치와 추모시를 함께 실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투사의 순국 장면을 생생히 그린 그림으로는 유일하다.
1923년 효제동 총격전을 목격한 화가 구본웅은 1930년 시화첩에 이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1924년, 김상옥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1887~1958)이 그의 전기를 집필해 간행했다. 김상옥은 일제 강점기 초기의 무장 독립운동과 의열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상옥 의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988년 서울 종로에 ‘김상옥 의거 터’ 표석이 설치되었고, 1998년에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마로니에 공원에 세운 김상옥 의사 동상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김상옥 의사 묘소.
영화 <밀정>(2016)의 초반부에 일제와 총격전을 벌이다가 총에 맞은 발가락을 스스로 잘라내고 끝내 자결하는 김장옥(박희순 분)이 바로 김상옥 의사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1992년 국가보훈처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시리즈 사업을 벌일 때 최초로 선정한 독립운동가 역시도 김상옥 의사였다.
대체로 독립운동가들은 홀몸으로 일제 고관을 저격하거나 행사장에 폭탄을 던지는, 짧고 정적인 순간으로만 기억되기 일쑤다. 그러나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제와 쫓고 쫓기는 극적 총격전을 벌인 김상옥 의사의 이야기는 우리의 독립투쟁이 감추고 있던 역동성을 보여주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원문 : 이 풍진 세상에